내가 당신을 기억하겠다, 조부사장. 안녕히 가시길, 그리고 또 만나길.
나는 시계가 여러 개 있다. 그중에서도 "R사"의 시계를 경조사 때만 착용하곤 한다. 주일에도 거의 잘 착용하진 않고, 몇 달에 한 번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번 주에만 장례식을 2번 참석하다보니 2번 착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갑작스레 아버지 회사에서 들려온 비보 하나, 오래된 기술자 한 분과의 짧은 이별이 아니겠는가. 나 또한 죽음 이후엔 그곳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어쨌거나 저 시계는 자주 차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1995~2023, 28년. 자기보다 15년 가까이 어린 대표를 무려 30년이나 모시고 살았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고, 도대체 무엇이 당신을 지금까지 달려오게 만들었을까. 기존의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과 다를 바 없던 20대 후반의 젊다 못해 어린 사장의 작았던 건설 기업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30여년 전, 나의 아버지의 어떤 부분과 어떤 야망에 매료되어서 당신은 자석에 이끌려오듯 따라온 것일까. 자신의 커리어와 가정까지 걸고 이전 회사에 사직서를 낼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도련(?)이 전혀 아닌데도 아버지 회사를 방문할 때면 언제나 도련님이라 불러주며 이미 굽은 허리를 한 번 더 굽히며 인사하던, 손주 보듯 예뻐해주셨던, 나를 볼 때마다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의 일부를 내게 용돈으로 주곤 했던 인자한 할아버지, 조부사장. 백발의 포마드, 항상 단정하게 정장을 위아래 세트로 입으며 (내 시점에서) 깔끔함의 정석을 보였던, 그리고 최근엔 고목나무를 멋지게 코팅해서 평상시엔 고목나무, 비가 올 땐 튼튼한 벤츠 장우산에 몸을 의지하며 몸을 움직이던 당신, 캐딜락과 제네시스 고급 세단을 번갈아가며 타던 당신, 외모나 내모(?)나 그 멋진 품격을 곁에서 경험할 수 있어서, 감상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내가 한 두 살씩 나이를 들어갈 때마다 오래된 사람들과 한 둘 씩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나의 주변을 한 둘 씩 자리를 채워갈 것이라고,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나 사회적으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람들로 주변이 거의 가득 차 있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제는 그들이 셋 넷 씩 무더기로 퇴장하기 시작하고,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주변을 새롭게 채워가는 이 상황을 돌아보니, 나도 20대 후반으로서 아직도 어른이 되기엔 멀었지만 어른이라는 것에 가까워져가곤 있구나. 마냥 어리기만 한 때는 끝나가는구나 싶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는 퇴장이 임박했고, 아버지도 퇴장이 한 수십 년 남았을라나. 이것이 세대교체란 말인가.
작년, 2022년 말, 나는 아버지 회사와 우리 가족, 특히 나를 위해 22년을 운전한 박기사의 퇴직으로 그와 헤어졌고, 그로부터 약 7개월 뒤 한 명의 부사장과 평생의 이별을 경험한다. 다음은 또 누구일까. 이미 그전에도 떠나간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버지의 수족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나와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는구나 싶다.
서울에 살면서도 주일 만큼은 어떻게든 본가로 가서 예배를 드리던 당신, 그곳에서 당신은 어떤 장로였을까. 궁금하지만, 이제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가 아닌 추억과 추모를 담은 과거의 이야기로 들을 수 있겠지, 아주 만약에 가서 물어본다면. 물어보러 갈 일도 없겠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좋은 이유는, 회사에서 당신에 대한 부하 직원들의 평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조차 인정받은 사람이 교회라고 크게 달랐을까. 이렇게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또 하나의 영웅이 하차한다. 남은 당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잠시 기도했다.
당신의 빈 자리는 빈 자리 그대로 남기고, 누군가로 채워넣지 않겠다. 다만, 그 자리를 내가 채워가며 주변인들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랬던 당신을 모든 면에서 뛰어 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오늘 하루가 거름이길, 어제는 거름이 되었길.
내가 당신을 기억하겠다, 조부사장. 정말 고생 많았다.
#일상 #생각 #일기 #어제 #추모
#안녕 #이별 #세대교체 #사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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