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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니 아주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 친구가 있다.
정확히는 나의 유학 시절 어학원 선생님이자 친구, 그리고 나의 좋은 형님. 이곳에서 잠시 쉴 계획을 세우던 중에 먼저 연락을 준 당신, 언제나 그러했듯 평범하고 시답잖은 근황을 주고 받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고, 인생을 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자신은 인생이라는 것의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유언을 던지듯 말을 했는데, 내가 영어랑 필리핀어,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해서 100% 알아들었다고 볼 수는 없었겠지만 대화를 하면서 그런 뉘앙스가 많이 풍겼다.
의미심장한 말을 계속 던지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 얘기하며 나의 인생은 후회가 없는 인생인지, 만약 당장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너는 무엇을 하고 누구에게 달려갈 것인지 등을 묻는다. 하루는 너무 짧다고, 친한 친구도, 특별한 누군가도, 어느 누구도 아닌 무조건 부모님한테 달려가서 뒤늦게나마 감사했다고 인사하겠다고 말하니깐 자기도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단다. 그렇게 되고 '싶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었'단다. 가정법 과거형의 단어를 쓰셨다.
이야기를 하고, 나도 조만간 쉼을 위해 돌아갈 계획이 있다고 말하니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형님인 그분이 말하길, "첫 날은 나랑 밥 먹고 커피 한 잔 하자"는 부탁이었다. 거절할 수도, 거절할 이유도, 거절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당연히 그리 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오늘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다. 동네에서 만나도 되는데, 구태여 아픈 몸을 이끌고 공항까지 와 준 당신, 그러지 마시라니깐 참...
점심으로 햄버거와 파스타, 스테이크에 피자, 그리고 버팔로 윙을 먹었다. 그리고 자주 가던 SB에서 커피 한 잔 했다. 외국의 SB는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문을 할 때 컵에 매직으로 이름을 써서 불러주는데 늘 그러했듯 "거 내 이름은 저스틴이오!"라고 말을 하지만 'Justin'이 아닌 'Justine'으로 적는 세상 모든 SB의 파트너들, 담합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냥 내가 터치펜으로 위에 e를 지워봤다. 허허-!
늘 그러했듯 '저스틴'이 아닌 '저스티네'라며 장난치던 당신은 오늘도 내게 그렇게 부르며 "너는 '마지막'까지도 저스티네구나"라는데, 문득 든 생각, 자각하게 된 현실, 이 사람과의 마지막 식사와 커피 한 잔 이었구나 싶다.
그리고 뜬금없이 백화점에서 사고 싶은 것이 있었다며 지갑을 몇 번 확인해보지도 않고 괜찮지 않냐고 권한 카드지갑을 덜컥 구매하는 당신, 그리고 향수 또한 그냥 추천해주는 향수로 구매한 당신,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던 당신이 충동구매를 하는 현장을 봤을 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영수증도 받자마자 지나가던 쓰레기통에 바로 구겨서 버린 당신, 이전과 너무 달랐다. 그렇게 나도 이후 일정과 쉼을 위해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고, 몇 번의 악수와 격한 포옹을 뒤로 하고 GRAB을 켜서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자기 카드와 현금을 넣고 빼고를 반복하던 그 카드지갑을, 그리고 향수를 갑자기 내게 건네더니 "나보단 너한테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이어서 "어차피 난 이거 다 못 쓰고 두고 떠나야해, 너가 한국으로 잘 가져가서 끝까지 쓰고 날 기억해줘"라며 웃지만 눈물을 흘리는 당신, 그 충동구매를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마지막이 아닐 것이니, 부디 잘 먹고 잘 자고 내년에 다시 보자고 인사를 했지만... 그 말에 난 자신이 없었다.
난 쉼을 위해서, 생각과 마음도 좀 정리하고 싶어서 왔는데 생각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버린 쉼의 첫 날, 이것 참...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변에서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구나 싶다. 세상엔 감사하고 감사할 사람들이 뭐이리도 많은 것인지. 왜 몸은 하나 뿐이고, 하루는 24시간 밖에 되지 않으며, 인생은 길어야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간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갚을 것이 너무 많은 인생과 영생, 나는 오늘도 채무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 소름인 것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빚'이 훨씬 많다는 사실.
내 인생이라는 뮤지컬에 품격있는 등장인물로 출현해서 품격을 유지하며 퇴장하는 당신, 앞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내 인생에 몇이나 더 있을까. 몇일지 모르니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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