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 서문을 읽으면서)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정말 얇아서 더욱 맘에 들고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지금 다시 꺼내서 읽어보려니깐 여전히 부담이 없지만, 그 안에 담긴 깊고도 심오한 뜻은 여전히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저 나는 대학생이라 잘 모르고 이제 졸업을 준비하니깐, 인턴이나 취업을 준비하니깐, 나는 현재 ㅇㅇ한 상황이니깐"등의 핑계로부터 자유하고 싶다. 이런 핑계로는 결국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으며, 어느 것도 누릴 수 없겠다 싶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심적으로 부담이 덜하면서도 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고, 독서라는 행위 중에서도 얇은 책, 이 책이 눈에 잡혔다.
이 책은 팀켈러라는 사람이 썼고, 미국에서 목회자란다. 뭐, 내가 찾아서 읽는 것이 아닌, 그냥 갑자기 목사님이 나에게 내밀어서 얼떨결에 가져왔고, 얇기에 집에 가는 길에 읽고, 집가서 잠깐 읽었더니 벌써 1독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사실 4번 읽었지만 지금 기억이 전혀 안난다. 그냥 이런 책을 내가 몇 번 깔짝깔짝 거리면서 읽었구나 하는 행위는 기억이 나도, 그 알맹이가 기억이 안난다. 내 방에 있는 거의 모든 책들이 나에겐 그저 기억의 조각들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이것이 일기인지, 리뷰인지 헷갈려지니 일단 각설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써보겠다.
우선 '복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 복음'이 무엇인지 정도는 나도 좀 알아보고 찾아봐야하지 않겠는가. 알아볼 곳이 없어서 일단 성경에서 뒤져봤는데,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시작부터 저자는 고전 3:21~4:7을 인용한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서로 편을 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뉘어 싸우기도 했단다. 그런 의미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엄청난 명대사를 친다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전 3:23)"고,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위대한 선생들을 멘토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 것, 정말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위험은, 그 위대한 선생이 우상이 되어 다른 선생들이 어리석어보이고, 하등해보여서 그들의 가르침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선생들의 의견이 다를 때 선생들의 우열을 가려가며 판단하려는 것이겠다. 나 또한 그런 '데이터와 레벨'을 두고 살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의 우열을 가려가며 살아왔다. 한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큰 교회를 일군 교회의 담임목사는 "당신은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하셨군, 괜히 '성공'한게 아니야"라며 경외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반대로 몇 년간 '(교인 수)성장이 더딘'교회의 담임목사를 향해서는 "열심히 일좀 하시지? 당신이 그러니깐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라는 식으로 경멸감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지금까지 생각으로 똥을 싸기엔 충분했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나, 쓰러지기 3분 전인 교회의 담임목사나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생을 두고 그 아래서 누가 조금이라도 더 우월하고 열등한지를 논쟁하는 것부터가 이미 글러먹은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것으로 교회가 찢어지고 깨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생각에서 이것이 정말로 비극이고 재앙이고 안타까운 일이구나 싶게 되었다. 내용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싶지만, 그냥 자유롭지만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끄적여볼란다.
나 또한 누구 아래서 배웠는지, 내가 누구의 자식이고 후손인지는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냥 전국대회에 나갈 수준의 평범한 중학교 팀에서의 주전이 아닌, FC서울, 전북FC 같은 프로팀 산하 유스팀의 주전이 되는 것이 훨씬 좋으며, 그냥 평범한 직장인의 자식이거나 후손보다는 넘어질지라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사업가의 자식익나 위대한 정치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 가난하거나 평범한 것보다는 평범 이상이거나 부한 것이 더 가치있어 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과 경외, 나를 향한 찬양이 정말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싶다.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원하는 나는 어느샌가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마치 내가 평범해지거나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열등해지는 것 같을 때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고, 마치 세상에서 쓸모가 없을 처분 대상 1위가 되는 것만 같고, 마치 사람들이 나를 향해 칭찬과 미담과 존경을 표해주지 않으면 나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설사 말한대로 될까봐 두려운 염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치기 시작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더욱 더 겉치레를 깔쌈하게 보이기 위해 속치레는 썩혀가는, 재앙의 반복을 한다. 이런 나에게 참된 자유란 무엇이고, 복음 곧 기쁜소식이란 무엇일까.
서문을 읽으면서,
4번째(마지막) 이야기. (0) | 2022.02.04 |
---|---|
3번째 이야기. (0) | 2022.02.04 |
2번째 이야기. (0) | 2022.02.04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