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 2장, 복음으로 새롭게 된 자기이해를 읽으면서)
바울은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다, 나는 인정받는거 정말 좋아하고, 때로는 나의 어떠함 - 부와 명예, 그저 Justin이라는 이름값 그 자체로 따봉을 받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기도 하는데.
그에게는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한지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의인이나, 죄인이나, 예배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그의 가장 첫 번째 정체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어야 했고, 바울도 조금은 깨달았던 것 같다.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력자였던 그에게 이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다, 그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고, 이전 것은 지나간 새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후 5:17).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정체성은 무엇이며, 1번, 2번, 3번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를 알리고 드러내는 가장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으로, 그의 피로 사신바 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 그리스도의 가치를 지닌 자,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예배하고, 찬양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괜찮은 사람으로 보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에 목매는 것도 아닌, 오직 속량하신 그리스도만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죄와 싸워가는, 성화되어 당신을 닮아가는 것은 점진적으로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그렇기에 당신이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그렇기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알고 묵묵히 지키는 예배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집단에서 5살 때부터 살아왔다. 15년간 이어졌던 3종목을 전공한 운동선수의 삶에서는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환경에 있고, 승자는 그 모든 영광을 독식하고, 패자는 쓸쓸히 이름도 남겨지지 않은 채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것이 운동선수의 현실. 지금 쓰면서 생각을 해보니, 사실 난 정자였던 시절부터 무려 2억~3억대 1의 경쟁을 하며 태어났었구나. 남들을 짓밟지 않으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짓밟히고 죽는 그런 사회와 세상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소망이 도대체 뭐란 말일까.
결코 썩지 않는 영광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동시에 이성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저 감성적이라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안에 영원한 소망과 빛이 있기에, 더 이상은 잠시의 어두움에 연연하며 살지 않아도 되기에,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하신 분이 구원해주심을 믿고 받아들이며 살 수 있기에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는 것. 오히려 참 신앙 -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 진정한 영생이고 이것을 영원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적인 것들을 구하며 살다가 죽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영원한 것을 구하며 죽음 이후에도 영원토록 구하며 얻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희망이 가득한지는 비교자체가 될 수 없다. 비교하려고 하면 할수록 초라해질 것이며,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이지 놀라워 찬양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헌금 많이 내고, 기도좀 많이 하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찬양 큰 소리로 하고, 맨 앞에 앉아서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아멘이라 외치는 것만이 아닌, 이웃을 전도할 때 욕과 조롱을 당하더래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이웃을 섬기는 것만이 아닌,
가장 먼저는 '먼저 섬기러 오신'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그렇게 섬기로 오신 그분을 따라 이웃들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많은 돈도, 순종하는 것도, 지각하지 않고 졸지 않으며 예배에 집중하는 것도 다 좋고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본질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놀랍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내 추악한 과거를 다 아실텐데, 죄인 중에서도 괴수, 분리수거마저도 까다로운 폐기물과도 같은 이 인생을 찾으러 먼저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 인생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죗값을 치루려고 상함을 당하셨다, 나의 죄악 때문에. 나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은 그저 써푸라이징 그 자체다!
이런 당신을 찬양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다,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당신께만 위대하심, 권능, 영광, 승리, 위엄이 있을 뿐이다(대상 29:11). 그리고 부르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나의 자리를 지키길 원한다. 세상의 판단이 어떠하든, 내가 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하는 판단이 어떠하든 내가 자신감을 세상 끝 날 까지, 영원토록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나의 것 되었다는 것. 언제나 어깨 펴고 가슴을 쫙 내민 채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 세상을 다스릴 수도, 섬길 수도 없다. 사람들의 인정은 정말 중요하지만, 이신칭의에 비하면 그것들마저도 '한낱 따위'로 전락하고 만다, 당신님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영광스러우시기에.
복음으로 겸손해진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들일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유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섬기고 이웃을 어떻게 내 몸과 같이 여길지를 고민한다.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를 구하며, 오히려 제대로 정립된 자아가 되는데, 그것은 '초월적인 무언가'로 가득 찬 자아이다.
교만하지 않으며, 낮은 자존감으로 어깨가 축 처진 채 살아가지 않는다. 비판을 들어도 귀기울여 받아들이며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회개할 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이신 당신을 그저 받아 누리되, 점차 더 크게 누리게 된다. 신앙의 그릇이 점점 커지며, 커지는 만큼 계속해서 부족함과 채움의 갈망을 느끼며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을 구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며, 그리스도라는 광대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가 된다. 내 중심의 신학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신학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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