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 1장, 인간의 본성적 상태를 읽으면서)
이번 챕터에서는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가 처한 네 가지 상태 - 공허함, 고통, 분주함, 나약함에 대해서 얘기한다.
1. 공허함
중심이 텅 비어 있단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마음의 상태'"라고 말했고, 이것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한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 마치 하나님이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낼 수 있다는 듯이 여기며 사는 것, 급기야는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단다.
이단 사이비 잡교주들처럼 "내가 신이다!"라는 말을 하며 살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서는 이런 식의 모습이 정말 많다. 내가 신이 되려는 것과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을 신으로 삼고 그것들을 향한 우상숭배가 정말 삶에 단 하나도 없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정말이지 우상숭배는 그저 나의 일상이라고 봐도 상관 없을 정도로 삶은 썩었다. 목적의식을 가져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 내가 어디에 속했고, 어떤 사람인지에 정체성의 토대로 삼는 것이 나의 일상이 아니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우상삼으며 살았던 그것들로부터 언젠가 토사구팽당하고, 삶의 공허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또 다른 우상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인생은 지속되고, 길을 잃고, 생명을 잃은 채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알맹이는 없는 상태로 살다가 죽고. 이런 삶은 그저 재앙 그 자체이고, 절망적이다.
2. 고통
내 인생의 중심은 무조건 나다,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기에 반드시 사람들은 내 주변에 있어야만 하고, 내 손아귀 아래서 움직여야만 한다,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니깐. 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처참하게 짓밟을 것이며, 나를 섬기지 않는 자들은 멸망시킬 것이다.
살면서 절대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마음이야 수십 수백번이고 먹을 순 있겠지만, 삶에 이런 '나의 선'의 성취란 없다. 그리고 나의 계획이 틀어질 때, 반대로 흘러갈 때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고,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은 채 계속해서 다른 고통을 주는 것들을 향해 나선다. 이것 또한 인생이고, 재앙 그 자체요 절망적이다. 남의 얘기 같지만, 사실 나와 당신의 이야기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이런 인생 속에 살면서 많은 고통을 받는다. 내가 자초하고, 내가 받는 어이 없음의 악순환, 그리고 진정한 고통은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어느 푹신한 쿠션보다도 더 안정적이고 편안한 당신의 품에 앉는 방법을 버리고 가시와 자갈이 가득한 험한 길바닥에 앉아 쉼을 요구하는 것이 나의 어리석음이고 나의 인생이다. 앉으면 따가워서 일어나고, 일어나면 다리 아파서 다시 앉게 되는 고통의 연속, 이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는가.
3. 분주함
스스로 신이 되려고 별의 별 노력을 하지만, 결코 될 수는 없는 비참한 인생, 그렇기에 오늘도 신이 되기 위해 돈의 노예로 살고, 명예의 노예로 살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것의 노예로 산다. 바쁘게 살다보면 신이 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헛된 꿈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철저하게 교만으로 이뤄진 노력과 일상을 보내는 이 자아에 하나님이란 좁쌀만큼도 없다. 누구보다 더 가지기 위해, 누구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누구보다 더 폼나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굴리기 바쁘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대조하며 우월감에 빠지기도,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반드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등장하거나 존재하는 법, 그렇기에 안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이뤄 놓은 위치'를 추격당하거나 뺏길까봐 스스로를 굴린다. 잘 사는 것이 아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우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오늘도 '웃는 가면'을 쓴다.
4. 나약함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지는, 그리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뒤떨어질 때 느껴지는 그 허탈감과 열등감, 그리고 자신에게 드리우는 의기소침함은 인생에서 자주 겪는 패턴아닌가. 약할 때 강함되시는 분을 진작에 버린 채 강해질 가능성도 없는 나 자신을 붙들기에 바쁘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만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만이 가장 강해지는 길이라는 것은 지식적으로만, 이론적으로만 끄덕끄덕하며 받아들였고(=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에게 너무나 무겁다며 벗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사실 입고 생활하다보면 정말 입을만도 하고, 그저 입고 다니는 자체가 훈련이 되어서 강한 몸 또한 생길 것이거늘, 당장 눈 앞의 힘듦만 보인다. 이렇게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자기가 스스로 걷어찬 복'을 향해 원망과 별의 별 아는 모든 쌍욕을 동원한다. 그렇지만, 그 '복이신 분'은 들어주신다.
Justin의 삶을 돌아보면, 공허함, 고통, 분주함, 나약함 모두가 들어있다. 나의 일상에 적용하여 글을 썼지만, 여러분들이 이 글에 공감하실지는 모르겠다. 아쉽지만, 나는 이것을 쓰는 것이 그대들에게 좋은 이상을 남기거나 인정받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 그냥 내 생각과 느끼고 깨달은 것들, 고치고 싶은 것들 등 잡다한 것들을 쓰며 나만의 추억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기에, 일단 두서 없이 그저 글을 계속해서 써 내려갈 것이다.
각설하고, 아무튼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은 나의 상식과 지식을 벗어난 것을 넘어서 초월하여 일하고 계셨고, 일하고 계시고, 일하실 것이다.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입니다(시 23:6)"는 찬양을 받기 합당하신 당신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나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신가? 더 알고 싶지만 결코 다 알 수는 없는 존재이신 당신, 왜인지 모르게 자꾸 끌린다. 매력적이고, 신비하신 당신을 더 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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