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의 관점에서 세속화
신학적 의미에서 세속화는 반드시 무신론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이 현대사회에서 어떤 발전과정을 겪었으며 신학의 응전과 대응현상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책에서 모든 무신론 현상이 모든 시대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오직 현대 무신론의 성격을 다루고자 한다.
그는 무신론의 시발점을 기계론적인 닫힌 세계상으로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세계가 유한한 물질들만의 자체적인 과정으로 생겨났다는 주장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초월적이거나 무한한 원인을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이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신성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전제와 이야기들은 “이것들 외에도 신적인 존재에 대한 주장이 어떤 진리도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야만 했다. 이것은 오직 종교적 표상에 관한 계보학적 해설(erklärung)로만 가능했다 ” 즉, “하나의 인간들의 산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포이어바흐의 종교 과학적 무신론이야말로 “최초로 완성된 무신론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유한성으로부터 종교가 고안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는 “무한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의 능력(wesenkraft), 즉 이성(vernunft), 의지(wille), 사랑(liebe)이었다.” 이런 생각은 헤겔적인 생각의 연속이었는데, 사실 유한한 인간이 아무런 근거 없이 무한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인간의 존재가 무한하다고 하는 사고를 통해서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존재와 종교의 존재를 연관시킬 수 있었다…종교는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한정되지 않고, 유한하지 않으며, 무한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의식에 대한 한정에 대해서 바르트와 같은 독일의 신학자들은 그것이 인간화 되어버린 19세기 신학에 대한 심판 정도로 이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신학의 필요성에 대해서 더욱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포이어바흐 이후로부터 신학이 세상에서 그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설명 없이 집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르트가 말하듯이 ‘위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함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는 이어서 또 다른 형태의 무신론이 등장했다고 말하는데, 이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니체이다. 니체의 무신론에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이 기반이 되었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모든 강력하고 놀라운 동인들을 자신에게 감히 전가시키지를 못한다. 그가 자신에게 있어서 위대하고 강력한 것들을 초인적인(übermenschlich)것으로 또한, 자신과 거리가 먼 것으로 가정되는 한 말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는 두 가지 면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불쌍하고 연약한 면이고, 하나는 강하고 놀라운 면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영역 중 첫 번째를 인간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긍정해야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만 한다. “무신론은 여기서 단순한 계몽의 문제가 된다.-포이어바흐에게서 처럼- 의지의 문제, 자기긍정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한 가지 사상사의 전환점을 발견하는데 바로 니체로부터, “데카르트 이후의 형이상학이 주체의 자기 확신에 모든 진리가 관계하는 것처럼, 니체에 의해서 주체성은 의지로서 좌초되었고, 모든 진리는 의지의 가치설정에 의해서 질서지어지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이전처럼 객관적 진리 라고 하는 영역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주관성위에 놓여 져 있었던 당시의 신학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니체는 위선적인 서양사회를 비판하는데, 그는 여전히 콩트와 같은 무신론자들이 이타성이나 박애심등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와 유사한 것을 그대로 붙잡으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라고 말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신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인데 인간은 이것이 그저 소소한 재조정 현상인 양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제 당신은 인간을 좌절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신 없이 살 수 있다는 위로의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기 있는 소수만이 세계에는 의미가 없다고 인정할 수 있다.”
이런 새 시대의 패러다임은 결국 ‘텅 빈 초월’의 무신론이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판넨베르크는 예언한다. “새로운 시대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은 우주론적 사고의 그릇도 깨트려버렸는데, 하나님의 숨겨짐에 대해서는 더더욱 많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계의 근본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의 입장에 다다른 마당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이런 인간 의식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낳게 된다.
“사람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신성을 어떤 방식으로건 제시할 수 없게 된다.” 니체는 인간이 여태까지 견지해왔던 모든 것에 관한 신념이 급진적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인간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조차 모두 파기되어야하고, 전적으로 재조정되어, 이런 기가 막힌 절망을 디디고서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설 수 있는 새로운 인류인, 초인이 나타나야 만 한다. 결국 이 무신론의 역사를 통해서 먼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성과 절대성을 탈취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소멸시켜버렸다. 현대의 학문계는 하나님의 무한함과 절대성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이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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