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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acus) 세속화와 교회의 응전(4 of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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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화가 가져온 더 큰 변화들

이런 변화들은 몇 가지 공백들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먼저는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의 등장, 그리고 그의 세계관의 공백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질서의 공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지시해주던 윤리의 공백이다. 한마디로 일종의 연속적이고, 계속되는 아노미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붕괴 속에서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하위-문 혹은 반-문화현상들의 난립이다. 그리고 이런 수많은 분화된 문화가운데 법과 제도 그리고 자본이라고 하는 느슨한 끈만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공백상태를 향한 끊임없는 진행상황에서 세속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은 무엇으로 내면적, 사회적, 사상적 공백을 메우고자 했는가? 테리 이글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종교의 다양한 기능은 그 후계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독립체들에게 소중한 유산처럼 재분배되었다. 과학적 합리주의가 교리적 확실성을 인수하고, 급진적 정치의 문화는 세상의 얼굴을 변모시키는 임무를 물려받는다.”(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서구사회에서의 기독교를 말한다.) 그러나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즉시적으로 모든 형태의 종교를 사회로부터 제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3-1 사적 영역에 갇혀버린 종교

세속화는 종교를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다원화 사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각각의 종교에게 일종의 선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가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외치게 될 경우 사회에는 끊임없는 투쟁과 의견다툼이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 바로 공적 영역에서 사회를 통합시키던 역할을 하던 종교가 이제는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볼테르 같은 무신론자에게도 종교는 필요악이었는데, “볼테르에게 종교는 도덕을 보존하고, 그만큼 사회 조화에도 도움이 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사회 안정을 위한 유용한 장치로 여겨졌었다. 종교는 상위계층에게는 신학으로서 지적인 설명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하위계층에게도 성례와 예배,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식들을 통해서 그들이 삶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그러나 기술사회로 들어서면서 “세상만사를 인간의 주관성 또는 지성의 관점에서...포착, 표상, 이해, 관장, 산정, 평가, 제조, 관리, 주문 등의 작업을 펼치는 철두철미 과학주의적 사상”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모든 종류의 종교적 진리,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관한 진리는 질식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진리는 2차적 진리, 혹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이런 진리는 개인의 취향의 문제, 곧 개인의 실존에 대한 문제로서 개인의 결단과 취향에 따른 것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3-2 사회적 통합의 해체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을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의 가장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기능은 바로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사회가 자신의 질서를 지키는 방법은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도덕적 통념들에 대한 합의인데, 만약에 이것이 당연하게 지켜진다면, “사회에 대한 통제자체가 불필요하게 된다.”

두 번째로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사회의 법칙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전문용어인 사회화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들 통해서 아이들에게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초자아’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거부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피하게 된다. 피터 버거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자신 안에 일종의 ‘작은 경찰’이 생기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에 새겨진 ‘자연법’을 신성화하고 그것에 신적인 기초를 부여한다. 그리고 만약 어떤 개인이 그것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그의 내면의 ‘지하세계’가 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어 그의 탈선에서 다시금 돌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는 사회에서 탈선행위에 부여하는 처벌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막스 베버는 에밀 뒤르켐의 기능주의적 관점에 대항해서 종교의 내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집중했는데, 베버가 언급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첫 번째로는 권력자의 권력에 대해서 이론적이고 신학적 정당화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의 예로는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지도자의 권력을 정당화 시키는 것과 같은 역할이다.(공산주의가 일종의 종교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도 된다.) 두 번째는 베버가 ‘신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행복에 관한 것이다. 즉, 사회 계급에서 상위계층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힌두교의 브라만 계층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전 삶의 업보에 기초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로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에 일종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것이다. 종교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잘못된 현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하기에 종교는 때때로 권력과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종교가 잘못된 형태의 통치체제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건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통치 권력과 개인의 이해관계 속에서 화해를 이루는 이 ‘종교’의 역할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즘은 전통적이고 합의에 의한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강연을 보든지, 성생활 실태를 보든지, 현대인에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든지 간에 이전의 규칙들은 점점 제거된다. 물려받은 의미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각각의 사건은 앞서 발생한 사건과 단절된 채 외부 규범이 전혀 없는 사건이 된다.” 여기에 종교적, 내면적 진리가 개인의 주관에 속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간격의 폭은 더욱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계속해서 벌거벗은 권력과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끊임없는 전쟁터가 되고, 각각의 이해관계가 계속해서 분열하여 각 계층 간의 무한한 갈등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법은 마치 프로이트가 묘사한 초자아처럼 “우리가 순종할 수 있을지 그러지 못 할지에 냉담할 정도로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그저 초자아의 칙령을 발표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쿨 문화와 같은 반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사회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멋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시켜온 결과이기도하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없이 선한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3-3 질투사회와 그곳의 불안

사회가 자본과 기술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지리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반-영속적으로 형성되었던 모든 종류의 관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관계가 자발적인 관계 혹은, 순전히 금전적인 이익을 위한 관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매일 매순간 여러 가지 매체들을 통해서 접하는 광고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소비에 대한 강박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들은 끊임없이 sns에 올라오는 자기보다 뛰어난 타인의 몸 혹은 지식 또는 다른 무언가를 보며 저주받을 자신의 빈곤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현대인은 “우주적 질서에 기초한 인도문명에서처럼 자기 자신의 다르마(Dharma)에 자족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것 이외에 남이 가진 떡을 바라봄으로서 상대적 빈곤에 아파한다.”

고대사회의 종교는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모방 욕망을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서 억제하고, 불평등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이 폭로되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던 모든 종류의 시스템이 사라져버린 뒤의 현대는 “모방적 욕망과 경쟁이 고삐가 풀린 사회가 되어버렸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개인주의는 다른 외적 권위에 굴복했다. 이 외적 권위는 광범위한 문화 속에서 타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바로 이것 때문에 현대인은 항상 불안해하는데, 이 불안은 “다른 사람의 주목에 반영되는 자기의 ‘으쓱거리는 자아’를 바라봄으로써만, 혹은 자신을 유명세와 권력과 카리스마로 빛나는 다른 사람과 접속시킴으로서만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불안이다.”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인문학자중 한 사람인 르네 지라르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내적인 미메시스(mimesis)의 영향아래에 있는 적과 같은 형제들은 서로 모방을 부인하고 적으로부터 차이를 강조하면서, 구별을 시도하지만.....즉, 모두가 사실은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독창성을 믿고 있다.” 많은 오디션프로가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바로 그렇게 타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무대에 서서 자신의 업적과 존재에 대한 인정과 찬사의 ‘세례’를 받음으로서만 자신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과의 질투 섞인 경쟁 속에서 승리만이 자신의 존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이런 고삐가 풀린 모방적 욕망은 많은 이들에게 창조성을 위한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끝없는 경쟁 속에서 밀려날 수 있으리라는 불안감에 둘러싸이게 만든다.

끊임없는 질투의 상호작용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과 피로감으로 이끌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 대한 증오와 반 문화조차도 하나의 또래 문화로서 소비되고 있다. “저항적 소비주의는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고 먹고살 만 한 사람은 전원 참가하는 게임이 되면서 결국 사망했다.” 사실 이 모든 것들 속에 숨겨진 것은 단 하나인 바로 지위획득에 대한 욕망이다.


3-4 초월적 공허감(transcendental lonliness)

그리고 이 지위획득은 사람이 사회인으로서의 지위를 은퇴한 이후에도 일정부분 남아서 그의 인생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타인은 우리자신의 가치를 금전적인 가치로 환원시키며 우리를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형태든지 간에 진정성 찾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자리매김했으며” 그리고 사실 이 진정성의 언어는 “우리 도덕관념의 확고한 일부여서 우리는 그게 본질적으로 종교적 사고방식이라는 점조차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왜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왜 그토록 종교적인 언어와 열성의 분위기를 풍겨가면서 유권자들에게 박탈당한 것에 대해서 깨우쳐 주려고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이전에 종교행위를 통해서 얻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여행 안에서, 정치적 투쟁 안에서, 혹은 예술 속에서 절정의 쾌락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


3-5 공격성을 통해 안정을 향한 열망을 표출

그런 사회 속에서 사람은 자신 외에는 점차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런 불안감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유를 그토록 중요시하는 가치로 하자면 유명한 독일에서도, 자유와 안정감이 양자택일의 가치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냐고 물었을 때 54%의 사람들이 자유를 포기해서라도 안정감을 얻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불안정감에 대한 피로감과 질투의 잔여물들이 모여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공격성으로 재출현하게 된다. “사람들은 혼돈보다는 독재자에게 굴복하기를 원한다.” 혹은 자신들만의 사회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안정성을 찾아야한다.......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인정과 정체성이 불안정해질 때, 그들은 빈번하게 첨예한 외부자 혐오적인(fremdenfeindlichen) 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새롭게 사회적인, 그리고 내면적인 안정성을 약속받는다.”

오늘날 정치의 극단성, 혐오를 가장 많이 배제해야할 가치라고 말하면서도, 여자가 남자를, 젊은이가 노인을, 노인이 젊은이를, 동성애자가 보수 기독교인을 혐오하는 현상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1). 이런 외부자 적대감은 새로운 우리-감정을 만들어서 소속감을 형성해주게 된다. 혐오로 만들어진 소속감이다. 2). 외부자 적대감은 자신들의 행동양식을 정당화해준다. 3)또한 이런 적대감은 자신이 가치가 있다는 감각(selbstwertgefühl) 자신이 적대하는 세력을 이상적인 인간상에서 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할수록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를 떠나서도, 언제나 젊은이들의 문화 속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반문화가 형성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3-6 종교 지형도의 변화: 복음주의의 몰락 혹은 유사 크리스텐덤의 몰락

그렇다면 이런 지형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왔는가? 한국기독교의 성장은 영미 복음주의권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져왔다. 미국 사회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현대학문의 성과들과 기독교가 부딪히는 충돌을 겪게 되었다. 1925년에 있었던 원숭이 재판으로 유명한 스콥스 재판이후로, 사회 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교회는 근본주의의 형태로 사회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을 필두로 하는 신복음주의자들은.....근본주의의 날카로운 예봉을 부드럽게 만들면서...정통적 개신교 신앙을 고수하지만 반지성 주의와 폐쇄성을 내던짐으로써....고정관념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복음주의는 폐쇄성을 포기하고 여러 가지 신학적 다양성을 극복하고, 보수적 성윤리와 선교에 대한 열정적인 강조를 중심으로 연합했다. 이 복음주의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개인적인 헌신에 대한 중요성 강조
2) 예배와 예전의 현대화와 같은 변화에 유동적인 모습
3) 시장경제 체제와 같은 소비자 중심주의
4) 이전세대의 보수적인 성적 가치와 그에 파생되는 정치적 의견 피력
5) 현대사회의 문화를 이용한 적극적인 선교와 홍보. 등을 토대로 다시금 미국사회의 큰 목소리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이전에 권위를 통해서 하던 것들을 기업가적 혁신을 통해, 광고와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이런 물결이 한창 불어닥치던, 197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산업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국가의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면서 건강과 번영의 복음을 외치기 시작했고, 한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

한국교회는 잘 살아 보세의 외침에 세례를 한국 사회가 발전하는 데 사상적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어두운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급속한 도시화를 통해서 사상적 다양성과 비판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들이 ‘성공’과 ‘절대성’의 이면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할 때부터 교회는 급속도로 지식인들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기독교 국가를 방불케 하였던 미국에서도 세속적(secular)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인이자 미국의 언론인인 로드 드레허는 우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혐오스러운 편견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우리는 공적 광장을 잃었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교회 내부에서 조차도 자신들이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 굉장히 모호해져 버렸다. 데이비드 웰스는 신학의 실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말하는 실종은 어떤 어린 아이가 집에서 잘 놀고 있다가 한순간에 찾을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실종이 아니다....신학의 실종은 어린 아이가 무시되고 소홀히 대접받고 있는 가정에서 발생한 것과 비슷하다. 애들은 집에 다 그대로 있지만, 가족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없다.”

결국은 교회 내부에서도 세속화된 현대세계의 가치를 그대로 좇아가다가 현대세계와 마찬가지로 해체되고 분열되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웰스의 주장이다. 시대가 길을 잃었기에 시대를 따라가고 있던 교회 또한 길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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