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안으로서 존재해야할 교회
4-1 초월성의 회복
사실 모든 시대의 가치들은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것 위에서 건설된 것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의미와 고통의 의미 등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가 사회에게 주는 것은 일종의 강력한 질서부여 행위이며, 하나의 우주를 건설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왔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은 고대 세계가 생각하는 종교의 틀을 파괴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기독교의 진리는 “나의 밖에 있는 것으로 현실의 매우 감당하기 어려운 요소로서, 나의 소망과 희망에 반대하는 견고한 반석처럼 나타난다.”
만약에 기독교가 포이어바흐가 비판한 데로 인간의 염원의 투사에 불과하다면, 사회가 발달할수록, 인간이 그들의 능력을 확신할수록 그들의 무능력과 필요에 자신의 존재를 근거하던 교회는 점점 더 그들이 설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본회퍼가 불렀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종교의 약국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많은 도덕에 관한 논의들을 치워놓기로 결정해야한다. 그리고 르네 지라르가 성경에 대해서 말했듯이 모든 거짓과 불의를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놓기를 선언해야한다. 기성세대도 젊은 세대도 모두 절대자 앞에서 죄인으로서 세워야 만 한다. “가면무도회의 가장은 진리의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붕괴하게 된다....그들의 사회적 역할의 보호 장구는 그 심판의 순간에 녹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현재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의 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그 통일성이 유래 없이 상실된 상황에 있다. 각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소망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자한다. 그리고 교회가 각 당의 편을 들 때 마다. 그 정당이 지지를 잃을 때마다. 사회의 시선 속 에서 교회는 특정 정당이나 계층을 대변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윤리적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개념을 전인으로 붙들게 된다면, 복음서와 성경의 텍스트를 먼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잘못된 욕망을 폭로하는 텍스트로 읽게 된다면, 교회의 설교는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기보다는 초월적인 색깔을 가질 것이며, 많은 이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모든 계층과 더불어 모든 정당의 죄를 동일하게 지적하며, 동시에 그들의 윤리적 요구까지 초월하여, 그들이 지적하지 않는 죄까지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어야한다.
4-2 공동체적 헌신
로드 드레허는 이제 ‘덕을 상실한’ 사회에서 우리에게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는 “객관적인 도덕의 기준을 파기하고, 자신이 선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외부의 구속력 있는 종교적 이야기들은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마음 상태는 ‘야만주의’ 로 알려져 있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상황과 유사성속에서 4세기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상황을 바라본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붕괴하였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서 도덕적인 혼란이 야기된 상황이었다.
철학자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도 “오늘의 문화적 시기를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 비유한다.” 이런 혼란 속 에서 베네딕투스는 자신의 수도원 설립을 통해서 하나의 대안적 사회를 일구었다. 그리고 수도원 운동은 서양 문명의 전환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연구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오늘날은 ‘우리’ 감정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에 급진적인 탈 문화성과 헌신에 대한 요구와 함께 강한 소속감이 보여 진다면, 교회에는 강한 소속감을 줄 뿐 아니라, 사회에서 점점 높아지는 윤리적인 요구와 더불어 ‘우리’ 소속감에 대한 많은 이들의 갈망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그저 사람들에게 종교적 필요를 충족해주는 기업으로 보일 뿐이다. 급진적 공동체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기업에서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기업과 급진적 공동체에 차이가 있다면 , 기업에서는 언제나 성취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는 데 비해서, 공동체는 ‘증오’와 같은 감정의 기반위에서 존재하기에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공동체들과 교회의 급진성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급진성이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팀 켈러는 교회가 형성해야할 문화가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라고 말했다.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교회에는 자신의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시키는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주장자체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낀다. 교회가 일정한 형식이 없이 보편성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특정한 윤리형식이나, 예전형식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일종의 ‘율법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일종의 형식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과, 형식주의 가장 많이 싸웠던 종교개혁자들이 오히려 제대로 예전 적 이었다는 사실(형식에 중요성을 오히려 강조했다는)이 반박해준다. 교회의 갱신 과정에서 특정한 공동체 형식을 구성했던 몇 가지 역사적 예를 들 수 있는데, 특별히 감리교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형성했던 규율을 들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감리교를 장로교와 대비되는 신학적 운동이라고 생각하거나 개인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운동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으로 감리교는 성공회라는 국가교회 내에서 일어났던 갱신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운동 내부의 신학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감리교가 교회 갱신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흥 때문에 자선 활동이 보급되었으며...그가 설교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도록 사람들을 고무했다. 역사가들은 당시의 모든 구질서가 붕괴하는 가운데, 영국이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공포를 겪지 않았던 것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 웨슬리의 영향 덕분이라고 본다.”
감리교 운동은 당시 사회의 윤리를 회복시키고, 노예제를 폐지시켰으며, 기독교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감리교 운동의 신학적 강조는 매우 심플했다. 그것은 칭의 와 성화, 즉 죄책으로부터 자유와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러나 동시에 감리교 운동을 조직화 했던 웨슬리는 “공동체 없이는 신앙이 자랄 수 없고, 책임 있는 믿음으로서 보존할 수 도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공동체란 산상수훈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 구조는 그에 따르는 규율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구원받은 자들의 삶을 위하여 일반적인 규칙을 제정하였다. 그것은 세 가지 종류의 것이었다. 첫 번째는 악을 피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악을 피하는 것은 언어사용과 술을 마시는 문제등과 같은 특정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으로 이어졌고, 선을 행하는 것은 이웃의 물질적인 필요를 돕는 것과 영적인 것을 돕는 것이었으며. 개인적인 경건생활로 은혜의 수단을 활용할 것 또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런 규범들은 산하 소그룹들의 행동에 전제가 되는 것이었을 뿐, 모든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웨슬리의 공동체는 소그룹으로 나뉘게 되는데, 방금 말한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살고자하는 것이 확실할 때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규칙을 공고히 함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의 카스트제도나 문화적 간격이 웨슬리의 공동체 내에서 좁혀지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의 규범 덕분에 일종의 ‘열린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공동체적 삶의 규율은 1. 성경적이며, 2. 현대 상황 에 적용가능하며, 3. 이해하기 쉽고 명료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규율을 기독교적 공동체가 온전히 살아나가길 원하며, 율법주의가 아닌, 제자도의 삶을 살기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적용한다면 교회는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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